재미 통일운동가 김수곤 선생을 기리며
뉴욕청년학교·민권센터 이사장
스토니브룩 한국학회장 등 지내며
우리 사상·언어 지키려 공부모임도심재호·오인동 선생 등과 함께
미주 지역 통일운동가로 소개하자
“말만 일삼는 제 이름 적지 마시길”

2013년 노동절 시위에 앞장선 고 김수곤 선생(맨 오른쪽). 
2013년 노동절 시위에 앞장선 고 김수곤 선생(맨 오른쪽). 


임종 전에도 병상서 청년단체 후원미국 뉴욕에서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평화를 위해 힘써 오신 김수곤 선생께서 5월13일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다음날 전해 들었습니다. 1933년생이니 향년 90. 정신과 의사로 뉴욕청년학교 및 민권센터 이사장,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설립 후원회장, 스토니브룩 한국학회장, 6.15 뉴욕위원회 고문 등을 지내셨죠.

저는 2002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방문교수로 지내며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에 큰 후원금을 건네주시고, 스토니브룩 한국학회에서 몇 차례 강연할 기회를 마련해주시더군요. 20여년 선생님과 교분을 나누며 느낀 바는 한 마디로 ‘성자 같은 분’이었습니다.선생님은 제가 불편할 정도로 겸손하셨습니다.

2012년 제가 미주 통일운동가로 소설가 심훈의 아들로 1980년대 뉴욕에서 사재를 털어 1000여 명 넘는 남북 해외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운동을 벌이다 워싱턴으로 옮겨 2021년 작고한 심재호 선생, 2000년대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이 고안한 값비싼 인공 고관절 기구 등을 건네주며 통일운동을 벌이던 로스앤젤레스의 오인동 선생과 함께 고인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즉각 이런 이메일을 보내시더군요. “오인동 박사나 심재호 선생같이 몸 바쳐 민족애와 인류애를 실천하시는 분들과, 말만 일삼는 제 이름을 제발 한자리에 적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화협정 촉구 시위에 참여한 고인(맨 오른쪽). 
평화협정 촉구 시위에 참여한 고인(맨 오른쪽). 

그러나 선생님은 “말만 일삼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점잖은 의사가 각종 시위에 적극 앞장서셨습니다. 수많은 시민운동단체에 부담스러울 만큼 큰 후원금을 기꺼이 내셨고요. 며칠 전 제가 선생님 별세에 관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선생님 가족과 가까이 지내온 뉴욕의 지인이 귀띔해 주더군요. “돌아가시기 전 안 나오는 목소리 억지로 짜내어 ‘노둣돌’ 후원금 보내라고 따님에게 신신당부하셔서 6500달러를 보냈대요.” 병상에서도 통일평화운동에 힘쓰는 뉴욕의 한인 청년단체에 약 850만원을 보내도록 하셨다니, 생전 시민단체들에 얼마나 자주 후원하셨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선생님은 끊임없이 공부하며 우리 사상과 언어를 지키려 힘쓰셨습니다. 2010년대까지 스토니브룩 한국학회장으로 매달 공부모임을 주도하며 동학사상 등 “뿌리 공부 등에 나름대로 관여하며 좀 더 자신을 이해하고 회복하겠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긴 세월을 보내셨거든요.

2014년 선생님의 공부모임 결산보고를 이메일로 받아보고는, 영어·외래어 사용을 될수록 피하는 제가 존경을 담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고서에 ‘수입’ 대신 ‘생긴 돈’, ‘지출’ 대신 ‘쓴 돈’이라 표기하셨더군요. 1960년대 이민해 반세기를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오신 분이 말이죠.

선생님은 정이 많고 참 따뜻하셨습니다. 2008년 대학에 들어가는 큰아들을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눈물 펑펑 쏟으며 운전해 돌아왔다는 제 글엔 답장이 꽤 길었습니다.

“저는 경북 영일군 흥해읍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열두 살에 청운의 뜻을 품고 부모님 슬하를 떠났습니다. 멀리 도청 소재지인 대구로 중학교에 갔는데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이불 속에서 울던 생각이 납니다.”

1992년 국보법철폐를 주장하며 단식농성하는 고인(뒷줄 가운데).
1992년 국보법철폐를 주장하며 단식농성하는 고인(뒷줄 가운데).

2011년 어머님 1주기에 고향을 방문하면서,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의 ‘핵심 주동자’이자 ‘마지막 수배자’ 그리고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로 1984년 선생님과 뉴욕청년학교를 세웠던 윤한봉 선생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고, 익산 제집에 들러 하룻밤 묵기도 하셨습니다. 아내에게 “고마운 뜻”을 전해달라며 서울의 일류호텔 숙박비보다 많은 돈이 담긴 봉투를 방에 남기고 떠나셨더군요.

그리고 병약한 몸으로 박한식 교수의 ‘사랑방 3월 화상강의’에 참여하셨습니다. 박 교수의 경북고·서울대 5년 선배인 선생은 세계적 평화학자·운동가인 박한식 교수가 고향에서 존경받기는커녕 고교 동창회에서 빨갱이로 성토당한다고 안타까워하시면서요.

이런 분을 지난 1~3월 미국 방문 중에도 뵙지 못했습니다. 만남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건강이 나빠진다며 만남을 연기하자고 하시더군요. “섭섭하나 회복되는 대로 기회를 보십시다. 부디 용서하십시오”라면서요. 무척 존경하며 꼭 뵙고 싶었던 분이기에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영영 떠나신 게 참 안타깝고 한스럽기까지 합니다. 선생님께 끝없는 감사와 존경을 담아 명복을 빌 뿐입니다.

* 이 글은 2023년 6월 12일자 <한겨레>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1095471.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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